그가 없었다면 ‘5월 광주’ 제대로 알려졌을까…파울 슈나이스 목사 별세_조인빌에서 베토 카레로까지 투어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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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슈나이스(1933~2022)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1970년대~80년대 군부 독재시절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해외에 알리고 지원한 파울 슈나이스 목사가 오늘(11일) 89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나이스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 민청학련 사건 등 박정희 정권에서 일어난 반독재 투쟁을 비롯해 전두환 신군부에 항거한 5·18민주화운동 등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그는 1933년 중국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58년 일본으로 파견돼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일본에서 독일개신교선교연대(EMS) 동아시아 책임자로 일했고 1970년부터 독일 선교단체인 동아시아선교회동아시아선교회(DOAM, Deutsche Ostasienmission) 소속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의 군부 독재 실상을 세계로 알리는데 주력했습니다.

■ 민주화운동 구속자 재판 참관…“세계가 지켜본다” 메시지 전해

그는 1974년 벌어진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재판에 참관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은 그해 4월 공안 당국이 공산주의적인 인민혁명을 시도하려 한 혐의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소속 학생과 사회인사들을 처벌했던 사건입니다.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된 김지하 시인 재판 참관을 위해 매주 금요일 일본에서 한국으로 입국했는데 당시 참관인 중에서 외국인은 슈나이스 목사가 유일했습니다.

그는 1976년 있었던 3·1 민주구국선언 관련 구속자 재판도 빠짐없이 참관했습니다. 3·1 민주구국선언은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 ·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자 박정희 정권이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이들을 무더기로 구속한 사건입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지 못했음에도 꾸준히 재판을 참관해 구속자에게 용기를 주고 군사 정부에는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가장 기억해야 할 자료 운반책은 75년 일본으로 파송된 독일 동방선교회의 선교사 파울 슈나이스였다. (…)그는 76년 6월 ‘3·1 민주구국선언’(명동성당 사건) 때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된 김대중·함석헌·김승훈·문익환·안병무·서남동 등의 재판 과정을 한번만 빼고는 모두 참관했다. 당시 독일 여권자는 비자 없이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그는 주말이면 한국으로 건너가 자료를 챙겨 오곤 했다. 결국 그는 78년 12월 중정의 감시망에 걸려 홍콩으로 추방당했다. 중정은 그가 75년부터 78년 사이 50회 이상 한국을 방문했다고 발표했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자주 오갔다. 이후 그의 한국 방문길이 막히자, 이번에는 그의 일본인 아내 기요코와 세 아이들까지 나섰다. 슈나이스 가족은 아이들의 책가방에 넣거나 하는 방법으로 84년까지 200회 넘게 서울을 방문해 자료를 날랐다.
[길을 찾아서] 슈나이스 목사 추방되자 자녀가 ‘정보 운반’ / 오재식(한겨레 2013.04.10.)

■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에 자료 제공…독재 실상·민주화운동 알려

그가 재판 참관을 통해 목격한 군부 독재의 현실과 민주화 운동의 현장은 일본의 진보 잡지 <세카이(世界)>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세카이(世界)>는 1973년 5월호부터 필명인 ‘TK生’ 이라는 저널리스트의 이름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글을 연재했습니다. 이 글들은 한국에서라면 검열과 탄압으로 실리지 못했을 한국의 현실과 민주화 투쟁의 목격담을 생생히 전해 해외에서 한국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료로 주목받았습니다.
<세카이(世界)>(1977)'삭제된 역사-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명 ‘T·K生’의 주인공은 지명관 한림대 석좌교수로 2003년 밝혀졌다.1988년 3월까지 연재된 통신의 필자의 정체는 정보당국의 추적에도 드러나지 않았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2003년에야 지명관 한림대 석좌교수로 밝혀졌습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당시 풍부한 자료 인용과 상당한 정보력으로 화제가 됐는데 필자인 지명관 교수에게 관련 자료를 비밀리에 전달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슈나이스 목사였습니다.

1978년 12월, 그가 홍콩으로 강제로 출국당한 뒤 한국 입국이 금지되자 부인 사쿠라이 기요코 여사와 세 자녀가 그를 대신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료를 공수했습니다. 성냥갑이나 과자 상자에 각종 선언문과 사진 등을 숨겨 일본에 머무르던 필자 지명관 교수에게 전달했는데 1984년까지 서울 방문 횟수만 200회가 넘었습니다.

독일 공영방송(ARD) 8시 뉴스 화면(1980.05.22.) 독일 공영방송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1980년 5월 광주의 영상은 독일 공영방송 뉴스에서 방송됐다. 슈나이스 목사의 부인 기요코 여사는 힌츠페터 기자에게 광주의 실상을 신속히 전해 취재의 계기를 제공했다. ■ 독일 공영방송의 ‘5.18 민주화운동’ 보도 계기 제공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독일 공영방송 ARD는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영상에 담아 뉴스로 내보냈습니다. 이 영상은 위르겐 힌츠퍼터 기자가 촬영했는데 그는 영화 ‘택시운전사’(2017) 덕분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력 진압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이 영상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상을 신속하게 독일 공영방송에 알린 슈나이스 목사 부부가 없었다면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980년 5월, 서울에 있던 부인 기요코 여사는 일본에 있던 남편 슈나이스 목사에게 광주의 상황을 전했고 슈나이스 목사는 바로 독일 공영방송 도쿄지국에 알렸습니다. 도쿄지국은 힌츠페터 기자를 광주로 파견했고 이후 생생한 영상 취재물은 독일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힌츠페터는 기자는 이후 영상취재 사본을 슈나이스 목사에게 전달했고 슈나이스 목사는 이를 복사해 전 세계 기독교 교단에 발송해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렸습니다.

2021년 부인 기요코 여사는 암 투병 중인 남편 슈나이스 목사를 대신해 국민포장을 받았다(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88년, 입국금지 풀리자 바로 광주로

슈나이스 목사는 입국금지가 풀린 1988년에야 다시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1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바로 광주에 가 5.18 묘역을 참배했습니다.

슈나이스 목사 부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공로로 2011년 오월 어머니상을 수상했습니다. 2021년엔 5.18언론상 공로상을 받은 데 이어 우리 정부로부터 민주주의 발전 유공 국민포장을 받았습니다.

5.18 기념재단은 추모 성명을 통해 “목사님은 1980년 당시 독일 아시아선교회 선교사로서 5·18 참상을 독일 공영방송 도쿄지국에 알려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 특파원이 취재를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면서 “80년 5월의 광주는 그야말로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었다”며 “광주 학살이 묻히지 않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데에는 목사님과 같은 숨겨진 은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