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냐 평화냐”…선택의 순간 앞둔 러시아 음악의 ‘차르’_무작위 추첨 프로그램_krvip

“푸틴이냐 평화냐”…선택의 순간 앞둔 러시아 음악의 ‘차르’_슬롯과 소켓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_krvip

발레리 게르기예프
■ 발레리 게르기예프... 러시아 음악계의 '표트르 대제'

올해 69살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음악계의 표트르 대제' 혹은 '지휘대 위의 차르(황제)'로 불립니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마린스키 극장 음악감독으로 군림하며, 소련 붕괴 직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이 유서 깊은 극장을 명실상부한 세계 정상급 예술단체로 키워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바깥에서는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인 빈 필하모닉을 정기적으로 지휘해 왔고, 로테르담 필하모닉과 런던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한 데 이어 2015년부터 현재까지는 뮌헨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며 연간 150회 이상의 공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런던에서 공연한 뒤 전용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이동해 저녁에 또 무대에 서고, 다음날에는 다시 뉴욕으로 이동하는 식입니다.

2003년 일본 음악잡지 '음악의 벗'이 사이먼 래틀, 정명훈과 함께 '21세기를 이끌 차세대 지휘자'로 선정했던 게르기에프는 이제 러시아를 넘어 세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절대적인 마에스트로가 됐습니다.

게르기예프(좌) 푸틴(우)
■ 눈부신 음악적 성취 이면에는 푸틴 대통령과의 '끈끈한 유착'

그의 유례없는 존재감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탁월한 음악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인연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90년대 초 마린스키 극장 음악감독이었던 게르기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당국의 투자를 받기 위해 전방위로 활동하던 중 시 관료로 근무했던 푸틴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푸틴이 러시아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게르기예프의 야심도 점차 커졌고, 푸틴의 영향력을 통해 마린스키 극장이 참여하는 '백야 축제'를 비롯한 국제적인 규모의 음악 행사에 러시아 금융권의 든든한 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푸틴 집권 이후 2008년 오세티아 분쟁,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당시 게르기예프는 푸틴을 열렬히 옹호했고, 푸틴은 마린스키 극장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며 화답했습니다.

일례로 2013년 극동 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마린스키 분관을 개관한 것은 음악감독 게르기예프의 '친 푸틴' 행보의 결과라는 데 이견이 없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푸틴이 2000년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부터 게르기예프는 '핫라인'을 통해 푸틴과 수시로 소통하며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카네기홀의 ‘지휘자 교체’ 공지
■ 2022년의 반전..."우크라이나 침공 입장 밝혀야"

그런데 이 권력과의 끈끈한 유착 관계가 2022년 2월 게르기예프 음악 인생의 최대 위기가 되는 반전이 벌어졌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 음악계가 '친 푸틴' 게르기예프에게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먼저 나선 쪽은 빈 필이었습니다. 빈 필은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뉴욕 카네기홀, 다음달 1일부터 2일까지 플로리다 아티스-네이플스에서 예정된 미국 투어 공연에 당초 지휘봉을 맡겼던 게르기예프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 야닉 네제 세겡으로 교체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른바 '게르기예프 사단'이자 역시 '친 푸틴' 성향으로, 함께 무대에 서기로 했던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도 배제하고 조성진에게 '대타'를 맡겼습니다.

빈 필에 이어 세계 최고 권위의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라 스칼라도 게르기예프에게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명확한 지지를 요구했습니다. 만약 이에 대한 호응이 없을 경우 이미 지난 23일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막을 올린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을 3월에는 지휘할 수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독일 뮌헨 시장 디터 라이터는 한 발 더 나가 뮌헨 필을 이끌고 있는 게르기예프에게 "28일까지 러시아의 야만적 공격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경우 해임할 것"이라며 공개적인 최후통첩을 보냈고, 로테르담 필하모닉은 같은 내용의 경고와 함께 올해 9월로 예정된 '게르기예프 페스티벌'을 아예 취소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게르기예프가 영향력을 행사해온 세계 정상급 음악 단체들이 이처럼 유례없이 직설적으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아직까지 침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25일 자 기사에서 "게르기예프에게 입장을 물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며 "이 엄청난 논란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세묜 비치코프
■ 음악계 잇따른 비판의 목소리 "침묵은 공범" "침략 전쟁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

물론 러시아 음악가들이 전부 게르기예프와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현재 체코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세계적인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는 성명을 통해 "악에 직면했을 때 침묵을 고수하는 것은 결국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하게 규탄했습니다.

체코 필하모닉 역시 본부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내걸고 함께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역시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스타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침략 전쟁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며, "후대에 그들은 피에 굶주린 범죄자로 남을 것"이라고 강도 높은 비판을 했고, 베를린 필 음악감독인 키릴 페트렌코도 규탄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 바렌보임 "평화로운 공존의 문화 전체에 대한 공격"

러시아 출신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받는 다니엘 바렌보임은 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한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평화로운 공존의 문화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중동 갈등 해결을 위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청년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창설해 이끌고 있는 바렌보임은 "현재 우리가 어떤 이바지를 할 수 있는지 자문하고 있다"며 곧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임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에게 인사하는 푸르트벵글러
■ 권력-예술 유착의 사례...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

권력과 예술의 유착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소환되는 음악가는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지휘계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입니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집권기에 베를린 필을 이끌며 히틀러와 괴벨스가 보는 앞에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나치당원인 적이 없었고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제국음악국의 부의장을 역임하며 나치 치하에서 지휘를 한 자체만으로 '부역자'로 몰렸습니다.

비록 종전 이후 전범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됐음에도,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의 대문호 토마스 만은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사형집행인 괴링의 미친개들과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그를 동정도 존경도 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카라얀은 선배 푸르트벵글러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친 나치' 행보를 보였습니다. 25살에 자발적으로 나치 당원에 가입한 덕에 일찍부터 출세 가도를 달렸고, 잘츠부르크와 바이로이트 등 세계 최고의 페스티벌에서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1945년 독일 패망 이후 2년 동안 지휘 활동이 금지됐고, 푸르트벵글러 마저 그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 경멸했지만, 카라얀은 1967년 미국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지휘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보다 더한 범죄라도 저질렀을 것이다."라고 당당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나치 전력'은 카라얀의 공과를 논할 때 어김없이 언급되며 그의 명성을 훼손했습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모든 인류는 형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절실한 때

곤경에 빠진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음악은 장르를 막론하고 지역과 세대를 초월해 평화와 인권을 지향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출세를 위해 혹은 또 다른 목표를 위해 이 기본을 망각했던 예술가들은 평생의 성취가 부정당하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게르기예프의 침묵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는 음악계의 현실도 그런 역사적 학습의 결과임이 분명합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며 인류애를 설파했던 베토벤의 선율이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