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턴 분류 작업 안 한다면서요?”…택배 ‘사회적 합의’ 시행 현장은?_창업, 돈 버는 방법_krvip

“올해부턴 분류 작업 안 한다면서요?”…택배 ‘사회적 합의’ 시행 현장은?_온라인 카지노 은행 전표_krvip


"오늘부터 저희들 아침 9시에 출근했습니다."

지난 3일, 한진택배 기사 이백열 씨는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씨의 지난해 평소 출근 시간은 오전 6시. 차에 실을 택배를 분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일찍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턴 3시간 늦게 출근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6월 마련된 택배 기사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올해부터 현장에서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연관 기사] ‘사회적 합의’ 첫날, 택배 현장은 “여전히 미흡” (2022.1.3. KBS1TV 뉴스9)

이 씨는 "아침에 나왔더니 분류가 다 돼 있었다"며 "살만해졌다"고 말했습니다. 현장에 택배 기사가 8명 있는데 분류 도우미가 7명 투입돼, 분류 작업을 다 해준 덕에 분류돼 있는 물건을 싣고 배송만 할 수 있게 됐단 겁니다.

사회적 합의의 핵심은 이 씨의 말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류 작업은 택배 기사가 하지 말고 배송만 하게 하자, 그래서 과로를 방지하자는 것입니다.

이 씨가 있었던 현장은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곳은 어떨까요? KBS가 주요 택배사 5곳에 공식 질의를 통해 확인하고, 현장의 노동자들에게도 물어봤습니다.

■ 대표 택배사 5곳 중 3곳 "분류 인력 투입 완료"…'인력난'은 공통 문제


CJ대한통운과 롯데택배, 한진은 택배 기사 2명에서 3명당 1명꼴로 분류 도우미를 투입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우체국은 당초 1,700여 명 투입을 목표로 했지만, 현재까지 300명을 더 채용 완료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로젠택배는 사업의 특수성 때문에 나머지 택배사들과 달리 별도 합의를 체결했습니다. 그 결과 올해 6월까지 천 명을 투입하기로 했고, 현재까지 80명이 투입된 상태입니다.

사회적 합의 당시 논의했던 인원 기준은 자동 분류기, 이른바 '휠 소터'가 없는 현장에는 택배 기사 2명 당 분류 도우미가 1명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각 사에서 밝힌 숫자로만 보면 CJ대한통운과 롯데, 한진은 그래도 이 기준에 맞게, 또는 가깝게 이행을 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 일부 현장에선…"그래도 분류 작업 합니다"

하지만 분류 도우미가 정해진 수에 맞게 들어왔다고 해서 택배 기사들이 완전히 분류 작업에서 해방된 건 아닙니다.

롯데택배 기사 함선권 씨는 "현장에 택배 기사가 22명 정도 있는데 분류 도우미가 11명 들어오고 있다"면서 "하지만 여전히 분류 작업은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처음엔 분류 도우미들이 우리 택배 기사들이 가는 데를 모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다른 기사한테 물건이 가거나, 오지 말아야 할 것도 오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려고 도와줬어요. 그런데 분류 도우미들이 너무 자주 바뀌다보니까 그런 과정이 계속되고 자연스럽게 분류 작업을 하게 돼 버리는거죠." - 롯데택배 기사 함선권 씨

숫자와 현장 상황은 다르단 건데, CJ대한통운에서도 일부 현장은 분류 도우미가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예 안 들어온 곳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전국택배노조가 CJ대한통운 기사 900여 명을 상대로 조사해봤더니, 63%가량은 개인별 분류가 잘 안 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일부 현장에선 같은 택배사라 하더라도, 노동조합 가입 여부에 따라 분류 도우미 투입 여부가 갈린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롯데택배 기사 김 모 씨는 "분류 도우미가 투입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진짜 허무한 마음에 이렇게 메일을 보낸다"며 취재팀에 제보했습니다. 전화 인터뷰에서 택배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조합원이라고 밝힌 김 씨는 "택배 기사 20명가량이 같이 일하지만, 분류 도우미는 1명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택배 물류 터미널에 가 보면 사진에서처럼 택배 기사들 사이에 형광색 조끼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택배의 분류를 전담하는 ‘분류 도우미’들입니다.
김 씨는 "어제(4일)만 해도 아침 7시 20분쯤 출근해 오후 1시부터 분류 작업을 하고, 5시에 배송을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택배노조가 소속돼 있는 대리점에 집중적으로 분류 도우미가 투입되는 게 아니냐고도 물었습니다. 실제로 같은 현장에 있는 택배노조 조합원도 "실제로 그런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롯데택배 측은 "현장에 확인해 본 결과, 1명도 투입되지 않았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택배 기사 수에 따라 분류 도우미가 투입됐을 뿐 조합원 유무가 분류 도우미 투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택배사들의 공통된 얘기는 이렇습니다.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분류 도우미가 많이 투입되지 못할 경우, 그래서 택배 기사들이 분류 작업을 할 경우 비용을 지급한다는 것도 사회적 합의의 내용이라고요. 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택배 기사들은 한목소리로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취재팀에 이 내용을 제보했던 롯데택배 기사 김 씨도 "분류 작업에 대한 비용을 한 달에 30만 원가량 지급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받지 않더라도 분류 도우미가 현장에 투입되는 게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계속 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어서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 물량 많아지는데 사람 부족…택배비도 인상 전망

택배사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분류 도우미를 투입하고 싶어도, 사람이 구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인력 구하기가 힘들까요? 우선 택배 물류 터미널의 위치가 큰 문제입니다. 롯데택배 측은 "터미널이 도심 외곽에 있는 경우가 많아 대중교통 출퇴근을 기대하기 어려워 구인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밝혔습니다.

또 대부분 분류 도우미들의 근무 시간은 4시간 남짓으로 매우 짧습니다. 짧은 근무 시간 때문에 임금도 적은데, 도심에서 먼 거리를 출퇴근해야 하는 일자리라 인기가 별로 없다는 겁니다.

코로나19 확산세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진 측은 "코로나19로 인해서 물류센터 근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렇게 인력을 더 투입하든, 또는 인력을 구하지 못해 택배 기사에게 비용을 지급하든 택배사 입장에선 추가 지출이 불가피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큰 영향은 택배 요금의 인상입니다. 실제로 한진과 우체국택배는 사회적 합의 이행을 위해 지난해 한 상자당 170원, 로젠택배는 190원가량을 올렸고 롯데택배도 올해까지 170원을 올릴 예정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택배 물량이 급증했습니다. 꼭 사회적 합의 이행만을 아니더라도 요금이 인상될 요인이 있습니다.

CJ대한통운은 지난해 한 상자당 250원을 올렸는데, 올해 작업환경 개선과 원가 상승 등에 따라 100원가량을 더 올릴 계획입니다. 로젠택배도 "(택배 요금은) 보험료와 최저시급 인상에 따른 비용 증가에 따라 동반 상승하는 구조"라며 "인건비 상승이 지속 예상돼 요금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택배 '사회적 합의'는 택배사와 택배 기사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소비자들과도 관계가 깊은 문제입니다. 실제로 CJ대한통운의 기사들은 이 사회적 합의의 제대로 된 이행을 둘러싸고 2주째 파업을 벌이면서 일부 배송 차질이 빚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소비자들이 택배 기사들의 노동 환경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인포그래픽 : 김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