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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하 24도 추위 뚫고 모인 180명…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 참관해보니

15일 오후 6시, 미국 중부 아이오와 디모인 시의 굿렐 중학교. 영하 24도의 강풍과 추위를 뚫고 주민들이 하나둘 강당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시간 만에 모인 사람은 모두 180명. 이곳은 공화당 대선 후보를 뽑는 코커스(당원대회)가 열리는 아이오와주 내 천5백 개 투표장 중의 하나였습니다.

투표인 명부에 이름을 기입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면서 강당 밖이 순식간에 북적였습니다. 이름과 주소 등을 적고 신분을 확인한 사람들이 하나 둘 투표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트럼프 코커스 캡틴' 모자를 쓴 트럼프 전 대통령 후보 측 선거운동원, 헤일리 지지 모자를 쓰거나 디샌티스 후보 측임을 상징하는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선거운동원들이 주민들과 편안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역(선거구)별로 따로 앉게 돼 있는 자리를 안내하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외국 언론의 취재도 자유로웠습니다. 처음 보는 한국 언론사의 취재진에게 다가와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주민도 많았습니다.

현지 시간 15일, 아이오와 디모인 굿렐 중학교에 마련된 공화당 경선 투표장에서 지역 당원들이 투표인 명부에 이름을 적고 있다. (촬영=KBS)
미국의 경선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코커스(전당대회). 당이 주관하고 당원만 참가할 수 있는 투표 방식입니다. 반면 프라이머리(예비선거)는 해당 주가 주관하고 일반인도 신청하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의 첫 번째 경선 지역인 아이오와는 주법에 따라 경선 방식으로 코커스를 택하고 있습니다. 프라이머리와 달리 공개 투표로 이뤄지는 것도 코커스의 특징입니다.

■ '투박하지만 열정 가득' 선거운동원 연설…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투표

투표 시작 시간인 7시. 의장이 개회를 선언하자 바로 투표 절차를 책임질 지역의 대표자를 뽑는 절차가 시작됐습니다. 까다롭지 않은 절차였습니다. 자천타천으로 후보를 추천해 주민들의 이의가 없으면 선출되는 방식입니다. 이들이 투표 결과를 취합해 주의 중앙당으로 투표 결과를 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공개 투표인 코커스의 특징은 투표에 앞서 후보 선거운동원들의 연설과 설득 작업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투표가 시작되자 각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이 나와 후보들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매끄럽진 않지만, 표심을 끌기 위한 '주민 선거 운동원'들의 열변이 시작됐습니다.

플로리다 주지사인 디샌티스 후보의 선거운동원은 플로리다에서 후보가 그간 해낸 업적들을 길게 늘어놨습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2위를 달리는 헤일리 후보의 연설원은 "나는 길게 설득하지 않겠다"는 첫 마디로 기선을 잡으며 "본선에서 바이든을 이길 수 있는 후보는 헤일리가 유일하다"고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투표장에서 지역 당원들을 상대로 연설 중인 헤일리 측 선거운동원(위)과 트럼프 측 선거 운동원(아래) (촬영=KBS)
마지막이 전 대통령 트럼프 후보 연설원의 차례였습니다. "이미 우크라이나는 평화롭다. 그런 데 돈을 쏟아붓기보단 우리 지역사회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줄 후보가 필요하다. 트럼프는 그런 실리를 추구해줄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주민들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며 크게 환호했습니다. 조용했던 디샌티스 측, 옅은 박수가 나오던 헤일리 후보 측 연설과는 아예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연설이 끝나고 투표 용지가 배부됐습니다. 손바닥 반만 한, 프린터로 인쇄해 열 몇 조각으로 잘라놓은 것 같은 조금은 허술해 보이는 투표용지를 받고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 앉은 채 이름을 써 봉투에 집어넣었습니다. 걷힌 봉투 안의 표를 강당 앞 단상에 모인 진행팀이 그대로 꺼내 수를 세고 수기로 결과를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단상 앞으로 나와 집계 과정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지역별 집계에는 채 10분이 안 걸렸습니다. 지역 대표자는 투표 결과를 지역주민들에게 그대로 불러주고 사람들은 다시 웃으며 투표장을 떠났습니다.

투표 용지 기입이 끝난 뒤 지역 대표자가 일일이 돌아다니며 투표용지를 걷는 모습(위), 지역 주민 크리스티나 사프 씨가 보여준 투표 용지 실물(아래) (촬영=KBS)
■ "여기는 트럼프의 나라"…백인·농촌 우세 지역의 열광적 '트럼프 지지세'

저희가 참관한 지역에선 '트럼프 22표, 디샌티스 6표, 헤일리 4표'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추후에 확인된 득표 최종 결과가 트럼프-디샌티스-헤일리 순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비슷한 비율로 표가 나온 셈입니다. 크지 않은 규모의 투표, 투표용지에 이름을 쓰면서도 자유롭게 대화하는 사람들, 반상회 같았던 투표장 분위기에 비하면 꽤나 정확한 결과가 반영된 투표 결과였던 겁니다.

아이오와에서 트럼프 후보의 득표율은 51%. 압도적 1위로 절반을 넘었고, 2위인 디샌티스 후보와 30%포인트나 차이가 났습니다. 아이오와 코커스 역사상 1, 2위 최대 격차입니다. 투표장에서도 트럼프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가장 컸습니다. 저희가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도 트럼프의 이름이 나오면 주변 사람들이 팔을 들어 환호하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다섯 명을 인터뷰했는데 그중 네 명이 트럼프 지지자일 정도였습니다.


주민 숀 고든 씨는 "여기는 확실한 트럼프의 나라"라며 "트럼프는 늘 그랬듯 미국과 미국인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헤일리는 조지 소로스 같은 거부들에게 재정 지원을 받는 사람이고, 디샌티스는 아직 정치에 너무 초짜다"라며 다른 후보들은 자격 미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역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제니퍼 기어링 씨 역시 "미국 시민들은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쪽 국경지대를 통제하고 다른 나라에 쓰는 돈을 우리 나라로 가져와야 한다"며 트럼프만 그걸 할 수 있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투표장을 채운 사람은 모두 백인이었습니다. 아이오와의 백인 인구 비중은 90%에 육박합니다. 아이오와는 농촌 인구 비율이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도시 쪽보다는 농촌 쪽에서 트럼프 지지세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도시인 디모인에서도 트럼프 지지가 이 정도라면, 외곽 지역에서는 어떨지 쉽게 상상이 갔습니다. 전국적으로도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은 백인과 농촌 지역에 많습니다. 최근엔 중산층이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걷은 투표 용지를 직접 확인하고 있는 선거 운영자들(위) 후보별로 모아놓은 투표용지 (아래)   (촬영=KBS)
다만, 트럼프 지지에 분노하는 주민들 역시 투표장에 적극적으로 나온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K팝 팬이라고도 밝힌 교사 크리스티나 사프 씨는 "니키 헤일리를 지지한다. 트럼프를 떨어뜨리기 위해 투표에 참여했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뒤 사회의 분열이 더 커졌다. 증오심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여성이나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관점에 화가 난다"면서, "학생들 간에도 인종 문제로 인한 갈등이 늘었다. 옳지 않은 일"이라고 덧붙였습니다.

■ 소박한 투표 과정이 만든 '트럼프 대세론'…2월엔 바이든 첫 경선 무대

작고 소박해 보이는 투표 과정이었지만, 이런 표심들이 모여 트럼프는 아이오와 대의원의 절반인 20명을 가져갔습니다. 전체 대의원 수로 보면 0.8% 수준에 불과하지만, 너무 압도적 승리여서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바이든과의 역사적 리턴 매치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초고속 대선행 열차에 탑승한 것"이라고 쓸 정도였습니다. 조직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을 하나하나 접촉해 내 편으로 만드는데 신경 쓴 트럼프 후보 측의 전략이 승리의 배경이 됐다고 외신들은 평가했습니다. 이렇게 투표장에 나온 주민들의 소소한 한 표는 11월 있을 대선의 가늠자가 돼 '트럼프 대세론'에 불을 지폈습니다.

아이오와주 디모인 굿렐 중학교 투표장에서 선거 운영자가 집계된 투표 결과를 취재진에게 보여주고 있다 (촬영=KBS)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 언론에서도 주로 각종 막말과 형사기소, 재판정에서의 언행 등으로 논란과 화제를 낳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대세'가 되는 과정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23일, 공화당의 두 번째 경선, 프라이머리가 뉴햄프셔에서 치러집니다. 경쟁자인 헤일리 후보의 아성이 강한 곳이어서 결과가 주목됩니다. 2월 3일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첫 경선 무대에 나섭니다. 흑인 유권자가 많아 지난 선거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반전의 무대를 만든 곳입니다. 불안한 지지율에 두 개의 전쟁으로 인한 부담까지 끌어안은 바이든 대통령이 어떤 경선의 밑그림을 그릴지도 관심입니다.